정부와 국회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법적 기반 마련에 속도를 내면서 국내 디지털 통화 체계의 전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를 명시하고 있으며, 금융권과 블록체인 업계는 이에 발맞춰 실무적 준비에 착수한 상황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통화나 실물 자산의 가치에 연동되도록 설계된 디지털 자산으로, 가격 변동성이 큰 일반 가상자산과 달리 안정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미국 달러 기반의 테더(USDT)와 서클(USDC)가 주요 거래 수단으로 자리잡았으며, 전체 시장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 2024년 3월 기준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30조 원이며,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2028년에서 2030년 사이에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약 2200조 원에서 28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지난 6월 10일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대표 발의하며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해당 법안은 자기자본 5억 원 이상을 보유한 국내 법인에 한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며, 대통령 직속의 디지털자산위원회를 신설해 관련 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육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에 논의됐던 발행 요건인 50억 원에서 크게 완화된 조건이다.
이와 함께 은행권과 핀테크 업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국민은행, 신한은행, NH농협은행, 기업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들은 금융결제원 및 오픈블록체인·DID협회와 함께 스테이블코인 분과를 구성하고 발행 구조와 활용 가능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근 케이뱅크도 협회에 참여하면서 공동 발행 가능성도 검토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실시간 결제, 해외 송금, 낮은 수수료 등의 이점을 제공할 수 있어 은행권에서도 실무 적용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는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거래 유동성을 위해 주로 활용되지만, 향후 전자상거래, 증권 결제, 국제 송금 등 다양한 금융 영역에서 확대될 여지가 크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편,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논의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면서 국내산 가상자산, 일명 '김치코인'의 시세가 큰 폭으로 상승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미버스(MEV), 팬시(FANC), 보라(BORA), 랩트나인크로니클골드(WNCG) 등의 가격은 최근 단기간에 2배 이상 급등했다. 그러나 이들 프로젝트는 스테이블코인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평가 등급 또한 낮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가상자산 평가사 애피와에 따르면 미버스는 종합 점수 45.83점으로 C등급, 팬시는 41.48점으로 C-등급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대감이 일부 저유동성 코인들의 급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하며, 테마성 투자에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디지털 통화 구조에 대한 중장기 분석도 나오고 있다. 블록체인 전문 리서치 기관인 디스프레드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상업은행 발행 스테이블코인, 비은행권 스테이블코인 등 세 가지 축으로 나뉘어 병렬적으로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각 축은 공공 결제 인프라, 제도권 금융의 디지털 전환, 리테일 기반 서비스 혁신이라는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주요 국가들도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나선 상태다. 미국은 비은행 주체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조건부로 허용하는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을 상원 표결에 부쳤으며, 유럽에서는 서클이 MiCA 인가 절차를 통해 규제 친화적 발행 모델을 구축 중이다. 국내 역시 핀테크와 웹3 기업들이 일정한 규제 틀 안에서 제한적인 실증 실험을 거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단순한 결제 수단의 도입을 넘어, 향후 금융 시스템 전반의 디지털 전환과 정책적 균형 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통화량 조절, 자금세탁방지(AML), 외환 규제 등 주요 거시경제 변수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정교한 제도 설계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얼 디스프레드 전략실장은 “비은행 주체의 참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기술 혁신과 금융 안정성 간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규제 프레임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